[중앙포토] 이 시기를 바라보면서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논쟁점은 동아시아 국가 중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한 원인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책임 소재 문제였다.
벼슬에서 물러나면 만세에 교육할 가르침을 전하여 학자들이 큰 꿈을 깨치게 하는 사람이다.그러나 때로는 진부하리라 여겨지는 옛말이 가슴에 딱 와 닿은 경우도 있다.
다산과 가장 가까운 인물을 찾다 보면 율곡 이이가 떠오른다.통치자가 난세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어진 재상을 발탁하여 보좌를 받고 있다는 것인가.자신을 선비라 하지 않으면 섭섭할 것이다.
율곡이 정책건의서 『동호문답』은 참으로 많은 부분에서 다산의 글과 유사하다.숨어있는 참선비를 찾아내지 못한 군주의 어리석음은 더 큰 불행이었다.
문무에 능하여 담당하지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
러·일전쟁으로 재미를 본 일본의 군국주의 열차가 폭주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읽지 못하고 미국과 영국을 귀축이라고 비판했다.한국 역사학계에서 사회적 관심을 끄는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권에서 논쟁이 시작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과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을 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학계와 시민사회의 거리를 좁힐 때 더 이상 역사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